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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이 개발했지만 일본만 부자 만든 노벨상급 기술

리딩타임 2023. 2. 14. 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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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1503년 기록에 조선의 화학자 둘이 기록돼 있다. 

김감불(金甘佛)과 김검동(金儉同). 

양인과 노비였던 이들은  금속의 녹는점을 활용해 은을 추출하는 획기적인 방식을 고안했고 이를 연산군 앞에서 시연했다. 연산군은 ‘연은분리법’이라 불린 이 신기술에 흡족해했고 은 채굴에 박차를 가하라 명했다. 

당시 국제 통화는 은이었다. 한 역사가는 이렇게 말했다. 

 

“은은 세계를 돌면서 세계를 돌아가게 만들었다.”

 

특히 은을 화폐로 사용하는 명나라의 수요가 많았기 때문에 명나라와 인접한 조선의 경제는 호황을 맞는 듯 했다.

‘황해도부터 의주까지 짐을 실은 수레가 가득하다.’
‘중국으로 가는 사신들은 최소 은 3,000냥씩 쥐고 간다.’ 
‘조선-명 국경 지대 물가가 치솟아 북경과 다를 바가 없다.’ 

(출처 - 조선왕조실록)

하지만 1506년 <중종반정>이 일어났다. 연산군을 몰아낸 중종은 지나친 은 생산이 사치를 조장한다는 이유로 연은분리법을 금지하라는 어명을 내린다. 

 

중종이 은광 개발을 중단시키고 30년 뒤, 일본 사신이 무려 8만여 냥(3,200킬로그램)의 은을 가져와 무역을 요구해 조선 조정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일본은 불과 30년 전만 해도 조선에 후추를 갖다 바치며 인삼과 은을 요청하던 나라였다. 어디서 이런 막대한 은이 났을까?

책 <리스타트 한국사 도감>에 따르면 일본은 경수(慶壽)와 종단(宗丹)이라는 조선의 기술자를 초청해 연은분리법을 습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두 사람이 김감불과 김검동일 것이라는 추측도 있지만 관련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일본은 조선의 신기술을 활용해 전세계 은의 1/3을 생산하는 세계 2위국 지위에 올랐고 이는 도요토미 하데요시가 30만 대군을 일으켜 조선을 거쳐 명나라를 점령하겠다는 야욕의 발판을 마련해 주었다. 조선이 개발하고도 외면한 연은분리법이 임재왜란의 불씨가 된 것이다. 

연은분리법은 동아시아 무역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일본이 조선의 인삼을 구매하는 용도로 제작한 인삼대왕고은(人蔘代往古銀)이라는 순도 80%의 은화가 조선을 거쳐 명나라로 유통됐다. 이를 통해 명(비단)-조선(인삼)-일본(은)의 삼각 무역 체제가 활성화되면서 16~17세기 동아시아의 상업 발달을 촉진했다. 

유럽도 은을 얻고자 ‘대항해시대’를 더 발전시켜 일본에 드나들면서 세계의 역사가 바뀌었다. 일본에서 수출된 어마어마한 양의 은은 당시 유럽 경제 변화의 큰 원인 중 하나가 될 정도였고 일본도 그걸로 유럽 기술을 받아들일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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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한 양인과 노비의 손에서 시작된 ‘나비 효과’였다. 조선인으로서 세계사에 큰 영향을 미친 몇 안 되는 인물이지만 신분이 낮아서인지 우리 역사에서조차 흔적은 희미하다.


본 콘텐츠는 아래 도서의 내용을 토대로 제작하였습니다. 

http://www.yes24.com/Product/Goods/95615107

 

지도로 읽는다 리스타트 한국사 도감 - YES24

이 책은 2017년부터 3년간 중앙일보 지면과 온라인에 연재한 ‘유성운의 역사정치’를 대폭 보강한 것이다. 원고 내용의 역사적 사실을 좀 더 충실하게 다듬었고, 또 신문 지면에는 넣지 못했던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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